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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잡담

밤손님과의 하룻밤

파구 2019. 8. 26. 22:23

조금 됐지만 황당했던 예전 기억을 얘기해 보겠습니다.

 

제가 고1 여름방학 때의 일입니다.

나름 금융지식에 빨리 눈을뜬(?) 저는 그때당시 용돈을 통장으로 받고
입출금이 가능한 통장카드를 가지고 돈을 ATM 에서 빼서 쓰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머리를 깍기 위해서 ATM 에서 2만원 정도를 인출하여 미용실로 향하던 중이었죠.

ATM기가 있던 상가와 미용실이 있던 상가 중간에는 인적이 드문 공원이 있었는데
그곳을 지나던 중 뒤에서 어떤 우락부락한 형이 저를 불렀습니다.
따라오라는 것이었죠, 그러면서 무언가를 부스럭 꺼내는데 맙소사 칼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린 마음에 순순히 따라갔죠.

 

아까 돈 꺼내는거 봤다면서 제 지갑을 갖고 카드만 저에게 주면서 돈을 뽑아 오라고 했습니다.
지갑에는 제 집주소, 학교 정보 등이 있는 학생증 등이 있었기 때문에 혹시 헤꼬지 할까 두려워
시키는대로 ATM기로 돈을 뽑으러 갔죠. 그때 제가 그래도 약 50만원 정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약 10만원 정도만 빼고 이게 다라고 나름대로 잔머리를 굴렸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그 강도 왈...
'내가 배고프니까 너네 집에 가서 뭐나 좀 먹자'
... 칼을 들었으니 뭐라 할 수도 없고 정말 막막하더군요.
가진거 다 드릴테니 그러지 말아달라고 했으나 역시 칼로 위협하기에
어쩔수없이 집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가면서 자기 처지를 말하더군요.
자기가 원래 여자들 등쳐먹는 양아치 인데 이번에 꽃뱀을 잘못만나 가지고 있던걸 다 뜯겼다고...
한 50정도가 필요한데 빌려주면 다음에 자기가 이동네 꽉 잡고 있으니까 잘 봐주겠다고...
저는 정신이 없었기에 네네 하고 집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다행이 아무도 없었고, 저는 라면을 끓였습니다. 강도자식... 4개나 먹더군요 ㅡ,.ㅡ

다먹더니 다시 그 강도 왈...
'야 나 오늘 갈데 없으니까 니네집에서 하루 자자, 부모님한테는 잘 둘러대고 알았지?'
이뭐병... 그러더니 제 방에 들어가서 전화를 들고 담배를 뻑뻑 피면서 여자친구인지 한테
전화를 하기 시작하더군요. 바보같은게 아까 저에게 말했던 자기 처지는 다 거짓말이고
들어보니 이름도 말하고 그러더라구요. 그러길 약 4시간...

부모님과 동생들이 다 들어왔지만 부모님도 역시 사람이기에 칼에 찔리면 다친다는 생각에
일단 친구라고 하루 자고간다고 둘러댔습니다.

잘시간이 되서 그 강도가 이러더군요. 내일 아침 부모님 나가시면 집좀 뒤져서 돈되는것좀
찾아내라고...


대충 알겠다고 하고 자게 됐습니다. 물론 제가 잠이 올리가 없죠.
일단 코골며 자는걸 확인하고 밤에 집안의 귀중품은 다 숨겨 두고 자리로 돌아와 생각해보니
무방비 상태인 것이 아닙니까? 별별 생각을 다했죠.
이자식을 의자로 내려칠까 그냥 미리 칼로 찌를까 조용히 경찰을 부를까...
내려치거나 찌르는건 나름 용기가 부족하고 괜히 뒷일 처리하기 힘들어질까봐 관뒀고,
밤에 경찰 부르자니 시끄럽고 귀찮아서 관뒀습니다. 그냥 잤죠... ㅡ,.ㅡ;

 

아침이 되어 부모님과 동생들은 다 나가고 저와 강도 둘만 남았습니다.
집을 뒤지기 시작하더군요. 하지만 제가 어제 다 숨겨놨으니 나올리가 있나...
짜증난 강도는 저를 데리고 어제 그 ATM기가 있던 곳으로 가서는
잘 보고 있다가 돈을 많이 뽑는 아줌마가 있으면 그걸 훔치라고 했습니다.
괜히 협박받았다곤 하지만 제게도 죄가 씌여질것 같아서 대충 거절하며
집에 부모님 통장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다고 말했죠. 사실은 어제 10만원 빼고 남은 제통장ㅡ,.ㅡ;

 

그래서 둘은 같이 집으로 들어갔고, 그 강도는 대담한건지 멍청한건지 자기는
스타를 하고 있을테니 저보고 혼자 가서 찾아오라고 했죠.
저는 이때다 싶어 은행이 멀리 있으니 시간이 걸릴꺼라고 말해놓고는
나가서 유유히 경찰을 불렀습니다.

 

'경찰서죠? 우리집 강도 들었는데, 와주세요^^' ... 너무도 태연히 말해서 그런지
경찰, 장난인줄 알았나봐요. 거듭 되묻고는 몇분뒤 경찰 두명이 왔습니다.
우리집 들어가는 길이 훤히 보이는 통유리인데 거길 그냥 당당히 걸어 가더군요-;
하지만 스타에 정신팔린 강도... 경찰과 같이 들어갔더니 갑자기 당황했는지
'XX야 (제이름) 왜그래? 무슨일있어?' 라고 시치미를 떼더군요.
강도가 가지고 왔던 칼을 제가 가지고 오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경찰은 반신반의 하면서
그 강도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역시나 경찰의 불신으로 수갑조차 채우지 않았더니
중간에 도주를 하더군요. 약 1시간의 추격끝에 겨우 붙잡았고, 그로인해 험악해진 분위기...

 

경찰 무섭더군요.
'야이 새퀴야 너 왜그랬어 어린놈이'
'저... 그... 그게'
'누가 눈 꼬나들랬어?!' 하면서 곤봉으로 눈을 치더군요. 덜덜...

아무튼 그렇게 경찰서로 가게 되었고, 취조를 하니 모든 사실이 들어났습니다.

그 강도는 겨우 저보다 한살 많은 고2였고 아버지는 공무원 이었죠.
넉넉하진 않았지만 외아들이었기에 하고싶은건 다 하고 살았고 그 여름에 친구들과
여행을 가려고 부모님께 돈을 요구했지만 얼마전 닥친 IMF 때문에 집 사정이 넉넉치
못하여 그 돈을 질 좋지 않은 부류에게 빌렸던 겁니다. 돈을 빌린 곳에서 갚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을 듣고는 이놈 저놈 삥을 뜯어 마련하려다가 에이 그냥 한탕
하고 말지~ 라는 생각으로 범행을 저지른거죠. 저를 보고 어린놈이 ATM에서 카드로
돈도 뽑고 하니 왠지 부자집 아이 같아 타겟으로 삼았던 겁니다.

 

아무튼 아직 고2여서 청소년보호법의 보호를 받을수 있다고 하더라도
특수강도, 특수절도, 가택침입, 흉기소지, 협박, 도주 등 여러가지 죄목이 겹쳐서
성인 감방으로 직행 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쪽 부모님이 제 앞에서 무릎꿇고 눈물을 흘리며 빌더군요.
제발 우리 아들 살려 달라고, 다시 눈앞에 보이면 전재산을 내놓고 자기가 대신 감방 가겠답니다.

휴... 저는 사실 용서를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뭐 다치거나 손해 본 것은 없지만 괘씸하니까요.
하지만 저희 어머니... 죄는 밉지만 사람은 미워하지 말랬다고,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합의금 한푼 없이 합의해줬고, 강도는 집행유예 2년으로 가벼운 형을 받았습니다.
그 강도가 집을 뒤져 찾아낸 크리스탈 종이 있었는데 예뻐서 여자친구를 주려고 했다더군요.
저희 어머니는 그 얘기를 듣더니 그 종까지 선물로 주시더군요.

지금 생각인데 그때 어머니 얘기를 들었던 것이 좋았던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합의금도 받고 저를 불안에 떨게 했던 장본인을 죄값을 치르게 할 수는
있었겠지만 혹시 그 이후에 나와서 이번에는 더 큰 범죄의 타겟까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니까요

 

어쨌든 이제는 술한잔의 추억이 되버린 사건입니다.
그때는 방송3사와 메이져 신문사들 모두 취재를 왔었고 전 어린마음에 인터뷰를 응했으며
비록 옆모습이었지만 모자이크도 없이 방송에 나가 방송직후 친구&친척들에게 전화가 빗발쳤기도
했지만요.

인터뷰 목적은 '용감한 10대 강도사건 슬기롭게 처리' 였지만 기사가 나간건 '무서운 10대 대낮에 칼들고 가택 침입'...

 

제 긴얘기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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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글은 10년 전에 내가 네이트에 썼던 나의 경험담이다.

참 오래되었다.

 

http://pann.nate.com/talk/2074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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